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송강 정철(1536-1593)은 조선조(1392-1910) 중기의 인물로, 예조판서, 우의정, 좌의정 등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정치가이며 대 문호이다. 가사, 장 단가, 한문시 등의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각 장르마다 탁월하여 시성으로 추앙받을 만하다. 오늘날에도 가사와 장 단가는 사랑받는데, 송강의 작품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 배경과 사조(思潮), 그리고 그의 생애에 대하여 개관해볼 필요가 있다.

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는데, 창건 작업을 주도했던 정도전은 숭유배불(崇儒排佛), 즉 고려조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불교를 배척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제시하면서, 이에 기초한 사회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.


불교가 인과응보설에 뿌리를 둔 내세적 종교라면 성리학은 삼강오륜에 기반을 둔 현세적 철학이다. 그러므로 조선조의 관료들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들로서, 오륜 중에서도 제왕에 대한 충성을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였다. ‘연군(戀君)’이 송강의 작품 주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연유한다. 그러므로 임금은 한 개인이기보다 국가 즉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.

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정치·문화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어왔다. 특히 한문이라는 문자를 공유하여 모든 게 하나로 귀일하는데, 한국에서는 1443년 조선조 4대 왕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이 새롭게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지만, 사대부들은 이를 ‘언문’이라 하여 천대하였고, 평민들이나 아녀자들에게 걸맞는 것으로 치부하였다.

하지만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송강은 한글의 가사 4편 장가 1편 단가로 작시한 게 90 여 수 남았는데 이는 퍽이나 많은 작품을 남긴데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. 그런데 고관대작에 이른 분으로 한글을 쓴다는 것은 퍽 드문 일이었다. 평민을 당신의 몸처럼 생각하며 서로 소통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. 조선시대를 통 털어 그리 많은 한글의 글을 남긴 자가 거의 없는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능숙한 우리말 구사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. 가사와 시조의 대가로서 그는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하며 고금에 보기 드문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세계를 펼쳐 보였던 것이다.

또한 여느 사람처럼 한문시를 지었는데 지금까지 남겨진 것이 천 편에 이르는데 그 질이 매우 높아 모두 성당시(가장 품격 놓은 시를 이름)에 이르렀거나 조금 떨어진 것도 그에 버금간다고 한다. 송강 정철이 시성으로 추앙 받아는 이유이다.

송강 정철은 1536년, 정유침의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. 그는 1552년 17세의 나이로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에 나서, 1561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, 이듬해에는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. 그 이후 강원도, 전라도, 함경도 등의 관찰사와 예조판서, 우의정, 좌의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. 하지만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임금의 미움을 사 위리안치(가시울타리로 사람의 접근을 막음. 현재 감옥의 독방과 같음) 되었다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풀려나 체찰사와 사은사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나 전쟁 중인데도 번번이 모함을 받아 사직했는데, 사은사 임기 중 모함으로 임금은 임무 마쳤다는 보고도 받지 않아 강화도에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1593년 12월, 58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.